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커맨더스 (문단 편집) === 창단~2010년 === ||[[파일:워싱턴 레드스킨스 로고.png|width=100%]]||[[파일:워싱턴 레드스킨스 워드마크.png|width=100%]]|| ||<-2> '''{{{#ffb612 레드스킨스 당시 로고 및 워드마크}}}''' || 1932년에 세탁소 체인사업을 하던 조지 프레스턴 마셜(1896~1969)의 주도로 매사추세츠 주 [[보스턴]]에서 '보스턴 브레이브스'로 창단했다. 1933년에는 [[애틀란타 브레이브스|야구팀]]과 명칭이 똑같아서 팀명을 '보스턴 레드스킨스[* 이 시기에 레드스킨스는 펜웨이 파크를 홈구장으로 썼다. 이후 1960년대 [[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]]가 또 홈구장으로 썼다.]'로 바꿔 활동하다가 1937년 [[워싱턴 D.C.]]로 이주하여 정착했다. 마셜 구단주는 타 팀들보다 먼저 대학 풋볼의 인기 포인트인 응원가나 밴드를 프로 무대에 들여오기도 했다. 첫 전성기는 1940년대로, 193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6번으로 영입한 쿼터백&러닝백 새미 보를 뽑았고, 보는 당시로선 생소한 기술이던 '전진 패스'를 활용해 러싱 위주이던 리그에 신바람을 불어넣었다. 이에 따라 팀은 [[시카고 베어스]]를 1937년, 42년에 각각 두번 꺾고 슈퍼볼 이전시대에 2번의 우승을 달성했다.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팀은 잦은 감독 기용 실패, 드래프트 부진, 구단주의 인종차별적 성향[* 1962년에야 정부의 압박으로 흑인 선수를 영입했는데, 전년도 하이즈만 트로피를 딴 시라큐스대 선수 어니 데이비스(1939~1963)였으며 드래프트 전체 4번으로 지명됐으나, 그마저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로 트레이드됐다.] 등으로 기나긴 암흑기를 맞았다. 이에 마셜 구단주가 타 팀들보다 먼저 전 시즌을 TV로 중계하고 자체 라디오 방송국을 차리는가 하면, 그린베이 패커스의 명장 얼 램보를 감독으로 영전했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. 1969년 마셜 구단주가 사망한 후 변호사 에드워드 베넷 윌리엄스가 팀을 사들였고, [[그린베이 패커스]]의 명장 [[빈스 롬바르디]]를 감독으로 모셔서 팀을 개선코자 했다. 빈스 감독은 전년도에 5승 9패였던 팀을 한 시즌만에 7승 5패 2무로 5할 이상까지 끌어올렸으나, 아쉽게도 그는 이듬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. 그럼에도 빈스가 다져놓은 전력은 여전히 살아있기에 팀은 점차 안정을 되찾있고, 1971년부터 전 LA 램스 감독 조지 알렌이 부임해 쿼터백 빌리 킬머, 러닝백 래리 브라운, 리시버 찰리 테일러, 라인배커 크리스 한버거, 노장 잭 파디 등을 중심으로 부임 6년간 안정적으로 이끌었고, 특히 1972 시즌에 정규시즌을 11승 3패로 마친 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댈러스 카우보이스를 26-3으로 꺾어 슈퍼볼에 첫 진출했으나 '노네임 디펜스'로 무장한 [[마이애미 돌핀스]]에 14-7로 패했다. 또 1974년에 대주주가 LA 레이커스 구단주 잭 켄트 쿠크로 변경되기도 했고, CFL 팀 토론토 아고너츠의 쿼터백 조 타이즈먼[* 은퇴 후에는 ESPN MNF, NFL 네트워크의 TNF에서 해설자로 활동했었다.]을 영입했다. 1981년에는 수비 전문가 조 깁스가 감독으로 부임했다. 그는 수비진 구축 외에도 타이즈먼을 중심으로 와이드 리시버 아트 몽크, 이를 보호할 가드 러스 그림, 태클 조 재코비같은 뛰어난 공격라인맨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격진을 앞세워 강팀으로 육성해 부임 첫 시즌 슈퍼볼에서 첫 우승컵을 들었다. 1983년 드래프트에서 텍사스 A&M 대학교 킹스빌 캠퍼스 출신 코너백 대럴 그린을 전체 28번으로 뽑아 플레이오프 단골팀으로 만들기도 했으며, 타이즈먼은 은퇴 전까지 통산 최다 패싱야드 25,206을 기록했다. 1985년 타이즈먼이 뉴욕 자이언츠전 도중 상대팀 LB [[로렌스 테일러]]에게 태클당해 다리가 'ㄹ'자로 복합골절돼 불행히 은퇴했지만, 1986년에 드래프트 146번 QB 마크 라이피언(워싱턴 주립대)이 입단해 라이벌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부진을 틈타 1987, 1991 시즌에 각각 슈퍼볼 우승을 달성해냈다. 1992 시즌 후 조 깁스 감독이 [[NASCAR|나스카]]로 떠났고, 1994년에 전 댈러스 카우보이스 OC 노브 터너가 감독으로 부임해 팀을 지휘했지만 OC 시절과 달리 감독으로서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해 평범한 성적을 냈으며, 팀 분위기도 혼란스러웠다. 1997년에 구단주 잭 켄트 쿠크가 사망한 후 신설구장 잭 켄트 쿠크 스타디움(현 페덱스 필드)으로 이전했다. 다만 잭 켄트 쿠크의 아들 존이 구단을 상속받을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1999년에는 언론재벌 댄 스나이더에게 팀을 팔았다. 스나이더 구단주는 넉넉한 재원으로 선수들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며 인수 첫 시즌에는 7년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루어냈다. 2001년에는 터너의 후임으로 마티 쇼튼하이머, 2002년 스티브 스퍼리어[* 대학풋볼계의 레전드 감독으로, 일명 'Fun N Gun 오펜스'라는 공격작전으로 플로리다 대학교를 내셔널 챔피언으로 이끈 감독이나, 프로에서는 대학과의 전술이 맞지 않아 시원하게 망했다.] 등 명장을 모셔오기도 했으나 성적은 평범했고, 2004년에는 조 깁스를 사장 겸 감독으로 다시 불러오기도 했다. 12년만에 팀으로 복귀한 깁스 감독은 덴버 브롱코스와 CB 챔프 베일리-RB 클린턴 포티스 간 맞트레이드를 벌였고, 동년도 드래프트에선 SS '미스트(Meast[* Man + Beast의 합성어.])' 션 테일러(마이애미대), TE 크리스 쿨리(유타 주립대) 등 알짜배기 영건들을 지명하기도 했다. 2005년에는 뉴욕 제츠로부터 WR 샌타나 모스를 영입했지만 성적은 이에 따라주지 않았다. 2007년에는 션 테일러가 무장강도에게 총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비극이 일었고, 깁스 감독이 은퇴한 후 하위권 팀이 되었다. 샌타나 모스나 브라이언 오라크포, 런던 플레처 외에는 스타라고 할 선수가 없었다. 2010년에는 명장 마이크 새너핸[* [[카일 섀너한]]의 아버지]이 감독으로 부임해 리빌딩을 하고자 했다.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팀의 성적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, 주 이유는 바로 구단주 스나이더의 '''주먹구구식 운영'''으로 꼽히고 있다. 그의 처참한 구단 운영 실력은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Daniel_Snyder#Criticism_and_controversies|영위백 항목]] 내에서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을 정도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